
릴리야, 잘 지내? 잘 지낸다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네, 이제. 지금은 아침 8시 13분이야. 눈을 뜨자마자 이 편지를 써. 2195년에도 보낼 수 없는 편지가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너에게 보낼 수가 없으니, 사실 이건 편지가 아닌 일기에 가깝지.
네가 사라진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어. 나는 새 손목을 붙였어. 신경을 잇는 수술은 두 번째지만, 여전히 낯설어. 회복하는 내내 네가 나오는 꿈을 꿨어. 너는 고전 영상 자료에나 나올 법한 병원에 누워 있고, 낯선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잠들어.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갑자기 울지. 사람들은 너를 내 이름으로 불러.
또 어떤 날은, 네가 정말 작은 방 안에 있어. 창문조차 없는 방 안에서 내 잘려 나간 왼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어. 꿈에서처럼, 그날 떨어져 나간 내 왼쪽 손이 너와 함께 있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 것 같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내게 달려 있던 손이 너에게 있다면, 내 신경을 공유한 일부를 네가 만진다면, 우리는 아직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가끔 새로 붙인 왼손을 누가 쓰다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놀라서 옆을 보면 아무도 없어. 이게 환상통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한순간 나의 온 신경을 쏟는다면, 아주 찰나의 감각은 너에게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다시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 전부 내가 기대를 놓지 못하는 탓이겠지. 나는 아직도 같은 부서에서 일해. 새로운 틈이 발생할 때마다 일종의 계시 같다고 느껴. 저 안쪽에는 네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세상이야. 또 네가 나와 함께였던 20대일 수도,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인 50대일 수도 있는 세상이야. 매번 저 틈을 넘는 상상을 해. 하지만 늘 상상에서 멈추고 말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웃는 것밖에 없어. 매일매일이 어떤 굴레 안에 있는 것 같아. 너도 이럴까? 처음엔 비극이었다가, 다음엔 희극이었다가. 한때는 내 안의 비극이 고갈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어. 네가 옆에 있을 때 그랬어. 근데 그러면 항상 더 나쁜 게 오더라. 지금은 그마저도 없어. 이 상황이 희극 같기도 해. 내가, 우리가 이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사실 답을 알고 있어.
이 순환을 끝내는 방법도 알아. 그런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그 이야길 하고 싶어. 오늘부로 정부가 '틈'의 에너지와 특성을 이용한 타임머신 연구에 들어간대. 너를 데려간 그 이례적인 대형 틈이 차원을 관통하는 자국을 크게 남겨서, 덕분에 어떤 원리의 실마리가 풀렸다나 봐.
있잖아, 릴리. 네가 사라지고 난 후에 내 방에서 나눴던 대화들을 곱씹어 봤어. 최초의 이방인이 내 이름과 같았다는 걸 기억해? 2075년, 한때 서울이라고 불렸던 도시의 외곽 아파트촌에 위치한 베이지색 대리석 건물. 3층 핸드스파 숍. 쉰여덟 살 노인. 지금은 그 나이가 노인인 나이가 아닌데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더라. 오늘 기록을 다시 읽어봤거든. 사진이 남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없더라고. 그리고 내 꿈속의 너는 내 이름으로 불리며 늙어가고 있어.
릴리. 나는 아마도 세상을 만지는 시도를 할 거야. 동시에 내가 잃어버린, 떨어져 나간 나의 일부를 찾아 나설 거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찾아 나서는 과정보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몰라.
이거 하나만 기억해 줘. 물은 어디로든 가고 어디로든 흐르잖아. 아마 세상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이건 확신이야. 내 애정이, 내 목소리가 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닿을 거라고 믿어. 내 꿈속의 네가 진짜 너라면, 내 손을 잘 간직해 줘.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와도 연결되어있지 않은 세상에 떨어져 한 없이 낯설고 어둡게 진행될 수도 있었을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너지지않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주제에 연주(릴리)는 정해진 해피엔딩을 알고나 있는 양, 계속해서 나아갔는데요. 저는 이 이야기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을 포함해 모든 불가능한 것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조금 벅찬 감정을 받았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포기하고 고개 돌리기에 익숙한 사람인데 릴리의 손은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가능한 것에 대해 그려봅시다. 바래봅시다! 구체적으로 상상해봅시다. 가능해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예시)
-시간을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넷플릭스 블랙미러의 샌주니페로처럼 죽은 이후의 가상공간이 생긴다면…
-릴리의 손처럼 시공간의 틈이 생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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