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
[책 선정이유]
이전 모임 때 이야기했던 것처럼, 원래는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이 읽고 싶었다. 지인이 신학자였던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공부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독서모임에서 다뤄보면 재밌을 거 같아 책을 검색해보았는데∽ 무려 858쪽 분량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바로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었다. 꼭 의식의 흐름대로 고른 것 같지만 단지 찰스 다윈의 대체재로 선택한 건 아니다. 우리는 2021년 정유정의 인터뷰집을 함께 읽었었다. 그리고 바로 정유정의 작품을 더 읽어보자! 했는데 2021년이 지나고 2022년이 지나버렸다. 온점에서는 그냥 하는 말이 없다.(있을 수도 있다) 읽기로 했으면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번 도서로 선정했다는∽ 약간 핑계 같고~ 머쓱한 이유를 덧붙여보았습니다.
[독서 소감]
최근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볼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더글로리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스토리가 흘러가고 종의 기원에서는 가해자, 악의 인물의 입장에서 스토리가 흘러가는 등 사실 따지자면 비슷한 점이 없지만, '이걸 재밌다고 해도 되나' 표현의 죄책감 같은 게 들었다.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볼 수 있으려면,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려면 나 스스로 악인이 되어야 했다"라고 말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악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내 안의 청군과 백군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기억에 남는 구절]
만약 내일까지 약을 먹지 않는다 해도, 그리하여 야밤에 또 개병이 나서 뛰쳐 나온다 해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죄다 술통 탓이었다. -199p.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다. -206p.
집중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호흡이나 맥박의 속도가 뚝 떨어졌다. 얌전하거나 유순하거나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흥분의 역치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는 유진의 심장이 뛰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259p.
여자의 가방을 들여다보는 건 그녀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했던가.∽어떤 낯짝을 가진 영혼이기에 한 인간의 삶을 '치료'라는 병분으로 조져놓을 수 있었는지. 어떤 심장을 가진 영혼이기에 '포식자'의 홈그라운드로 혈혈단신 쳐들어올 수 있는지. -264p.
국경 너머에 두고 온 건 아마도 나일 것이다. 세상 속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온 나, 지상에 단단하게 발을 붙이고 있다고 믿었던 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나면 돌아갈 길이 없다.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부옇게 흐린 저 겨울 대기 속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 말고는. -292p.
파고가 몸을 뒤집었다. 나는 사지를 풀어놓고 흔들리는 물결 위에 드러누웠다. 눈보라가 걷히고 하늘이 열렸다. 별들이 가까이 내려왔다. 빛이 이마에 닿는 순간 어떤 목소리가 은밀하게 속삭여왔다. 어머니가 옳았어. -273p.
잘 곳을 찾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한적하고, 12월의 밤은 스산하고, 바다는 부옇게 젖어 있었다. 자 앞 흐릿한 안개 속에선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짠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 -378p.
[작가/작품 리서치]
- 제목을 종의 기원이라 붙인 이유?
처음부터 제목을 정하고 시작한 유일한 소설이다. 다윈의 책에서 제목을 빌려온 거라, 이 어마어마한 무게를 어떻게 견뎌야 하나, 이만한 무게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잡지에서 읽었는데 한 학자가 “호모사피엔스 다음의 인류는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사이코패스를 하나의 돌연변이로 본다면, 이 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악이 내면에서 점화되고 발화하는지 그 기원을 찾아가 보자, 싶었다. 여러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이 책 제목의 몫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가장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 객체가 아닌 주체의 시선으로 악을 탐구한 이유?
작가로서 나의 테마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 안에는 밝은 들판과 어두운 숲이 공존하는데, 내 관심사는 후자다. 문학이 인간을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직업이라면 밝은 들판만 들여다봐선 안 된다. 시기·질투·혐오 같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가 뛰노는 숲도 들여다봐야 한다. 그 어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부자의 시선을 버리고 내가 악 그 자체가 되어야만 했다.
- 인간 내면의 어둠을 숲에 비유하는 특별한 이유?
자체 완성형의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숲은 서로 먹고 먹히며 진화가 이뤄지는 공간이다. 악은 앞서 말한 어두운 감정들을 비옥한 토대로 삼고 스스로 진화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 작가 스스로 도덕성을 버리는 과정이 필요했나?
- 맞다. 그래서 ‘도덕이라는 것은 말이 되는 그림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온전히 유진의 관점에서 생각한 자기 합리화다. 이 소설은 한유진이 세상에 펼치는 자기 변론이 돼야 했다. 어머니가 ‘유진아’라고 부르는 환청을 유진이 계속 듣는다는 설정 역시, 이 소설은 ‘한유진’이라는 인물 자체라는 걸 독자의 머릿속에 새겨 넣기 위해 만들었다.
- 대부분의 이야기가 집 안에서 펼쳐지는 이유?
글을 쓰면서 지도를 많이 그렸다. 소설의 배경인 군도 신도시 지리와 집 안의 동선을 전부 익히기 위해서였다. 공간에 제약을 둔 건 온전히 유진의 내면에 집중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였다. 유진이 읽는 엄마의 일기 역시 처음보다 300매 이상 줄였다. 엄마의 입장을 너무 자세히 그리면, 최대한 아들을 무해한 존재로 키우고자 했던 엄마의 절절한 마음이 유진의 마음보다 더 쉽게 독자들에게 가닿을 것 같더라. 살인 방식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독자를 설득하긴 쉽겠지만, 그 자체로 자극적이라 유진의 심리에 집중하기 어려워진다.
- 범죄심리학 프로파일러에게 자문, 실제 인물과 연관이 있나?
오래 전부터 이 책을 쓰기 위해 정신과학, 사회심리학, 범죄심리학,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등 관련한 이론 공부를 해왔다. 본격적으로 초고를 쓴 후엔 프로파일러와 정신과의사를 쫓아다녔다. 범죄자는 직접 만나지 않았다.
정남규(서울 서남부에서 실제로 발생한 연쇄 살인범의 주범. 2004년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무고한 사람 열네 명을 죽였다)의 이야기가 가장 놀라웠다. 그는 감옥에서 목을 매 죽었는데, 죄책감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살해함으로써 궁극의 살인을 완성한 것이다. 살인마 유영철은 사람을 죽이러 가기 전 기분을 고취시키기 위해 반젤리스의 ‘낙원의 정복(Conquest of Paradise)’이라는 곡을 들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유진이 집 밖에 나가기 전 이 음악을 듣는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사이코패스가 사람을 사물화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유진이 살해 대상을 ‘오뎅, 장작개비, 진주 귀걸이’라고 여기는 이유다.
- 소설 집필 후 듡 생각?
‘인간에게 도덕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살아가기 위한 약속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들. 또한 내 소설 속 인물들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압도적인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운명의 폭력성’이라 부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주저앉아야 할까? 언뜻 보면 절망적이고 어두운 이야기이지만, 난 항상 내 작품 안에서 운명의 폭력성에 맞서 싸우는 인간 의지와 존엄성을 그려 왔다고 생각한다. 이번 소설은, 한유진의 입장에서 보면 해피 엔딩이다.
아래 링크는 가장 재미있게, 잘 정리되어었는 인터뷰 기사입니다.
정유정 “오늘 하룻밤, 악인이랑 놀아보자” | YES24 채널예스
[발제]
사이코패스는 100명 중에 2명 꼴로 갖고 있는 질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 MBA 켈리 빈센트 박사는 "인류 전체 중 '경영자'로 집단을 좁히면 사이코패스 비율이 7%로 증가한다"고 했습니다. 주변에서 충분히 마주할 수 있는 수준이지요. 어쩌면 자기 자신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이코패스와 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방법, 또는 사이코패스로서 타인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생각해봅시
[대화 주제]
- 유진, 악인이라는 낯선 존재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는 않았나요?
- 유진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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