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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

[한유주/숨] 더 이상은 보낼 수 없어 말수가 적어진다

개는 단 한 번도 폭력을 겪어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믿을 수 없어서 오랫동안 개의 사진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그러니까 십 년 동안 들여다보았다는 말이다. 나는 부드럽게 돌아가는 음량 조절 버튼을 좋아해 왔다. 계단식으로 음량을 높이거나 줄이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본가에 갈 때면 개를 만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쩌다 개의 머리를 쓰다듬게 되더라도 얼른 손을 뗐다. 그럼에도 개는 내 주위를 어정거렸다. 본 적이 많지 않았으면서도 나를 지나치게 반겼다. -p.87

 

정도와 빈도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자살 가능성이 남아 있었고 여전히 딱히 자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자살한 뒤가 궁금했다. 사랑하던 개가 죽은 뒤에 나는 대상이 사라진 사랑을 어떻게 종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두 개의 사랑을 쉽게 종료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구체적으로 자살을 실행에 옮길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죽음은 늘 추상적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 역시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않을 것이며 언제까지고 차가운 추상으로만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토록 무력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죽음을 그만 생각할 때라고, 그만 반복할 때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랑을 이야기할 때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p.105

 


어릴 적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자살은 아니었다. 죽음이었다. 내가 죽음을 무서워하게 된 건 이때부터다. 굴을 싫어하게 되고 주황색 소파를 두려워하게 된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겠다. 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게 굴과 주황색 소파는 죽음을 연상케 한다. 화자에게는 비둘기, 개와 걔 그리고 사랑이 자살과 연결된다. 고속도로 위에서 죽은 비둘기, 겨우 십 년을 살고 죽은 개, 걔를 사랑하나 포기할 수 없는 자살 충동… 단순한 대상일지라도 누군가를 나락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두렵다. 계단식 음량 조절 버튼을 누르듯 간결하게든, 다이얼식 음량 조절 버튼을 만지듯 천천히, 균일한 속도로, 지속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도 떠난 이를 잊을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래서 누구도 떠나보낼 수 없다. 더 이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