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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

[김세희/가만한 나날] 초보(初步)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 자기 자신을 잃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낀 기분이었는데, 기습적이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무력하게 느껴졌다. 권위 있는 어른 앞에서 가끔 이렇게 될 때가 있었다. 좋은 배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 앞에 설 때. 그녀는 곧 어떤 질문이 나오리라는 걸 예감했고, 그에 앞서 자신의 표정과 마음을 준비시키려 했다. -p.73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p.80

루미에게 말하고 싶다. 낮에, 강변에 갔을 때, 자꾸만 거기 혼자 서 있는 늙은 내가 그려졌다고. 두렵다고. 70살이나 80살 먹은 내가 물 건너편에 있었다고. 등 뒤로 루미가 다가오는 게 느껴지고, 내 어깨에 두 손이 올라온다. 나는 여전히 감은 눈꺼풀 안으로 흐르는 물을 보고 있다. 팬을 꽉 쥔 채로. -p.192

'첫' 연애와 이별, 취업과 사회생활, 동거나 결혼은 그 사건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하고 알기 이전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현기증'처럼 맞닥뜨리게 되는 것들이 아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어지러움 속에서 일단 치르게 되는 '첫'들에 방심과 주저, 혼란과 실수, 상처와 좌절, 의심과 후회가 끼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것은 '첫'을 얼마나 잘 통과했는지가 아니라 더 나은 '다음'을 예비하여 이미 일어난 '첫'을 성찰해 보려는 태도일지 모른다. -p.324


삶은 초보(初步)의 연속이다. 우리는 태어나 셀 수 없이 많은 걸음을 걷고 있고, 그 안에서 수많은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아마 삶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해서 보행할 테다. 나는 내가 내딛은 초보의 순간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려 한다. 초보를 위해 고민하고 아파한 시간들이 이다음의 초보에 밑거름이 되길 희망하면서. 다음번엔 조금 더 깊은 발자국을 낼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